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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하늘과 (그) 땅을.....!” (창1:1b)
    성경은 무엇보다도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과 신비함과 오묘함을 장엄하게 울리고 있다. 이 창조야말로 기독교만의 위대한 선물이요, 재산이요, 능력이요, 소망이다. 이 말은 기독교의 모든 것은 창조로부터 시작을 해서, 창조의 본래의 맛과 멋을 드러내며, 결국은 이 창조의 완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완성된 하나님 나라(“Not yet”)로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계속해서 강조해 왔지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 곧 기독교의 유일한 창조의 사실을 그대로 통째로 이해하고 수용하여 모든 것의 출발점을 “신비, 위대함, 능력, 소망, 좋음” 등에 두고, 부요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위대함’을 비롯한 ‘좋음, 긍정’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고, 온갖 ‘좋지 않음과 부정’의 잔재들만을 풍성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를 펼치든지 간에 ‘좋음과 긍정’의 말을 하기보다는 ‘징벌, 파괴, 고통’ 등의 채찍을 들고서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선포할 때에는 그 좋은 말들(“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복 받습니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으면서도, 어렵게, 정말 어렵게 들어온 “천하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서 마구, 마구 징벌의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왔으니 정말 잘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칭찬만 해줘도 부족할 텐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혹자들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어렵게 들어온 사람들일지라도, 이제 기독교의 그 혹독한 채찍(율법준수)을 내려쳐야만 제대로 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대로 날라 가버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본인들도 다하지 못하는 무거운 이상한 십자가(율법의 저주)를 지우고 있다. 물론 필자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무시하거나, 폐기시키거나, 등한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복음의 은혜로 충만한 하나님나라의 부요함을 맛보게 하면, 성령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더욱 성숙되게 하시고, 더욱 새롭게 하시고, 완성된 하나님나라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달려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거룩한 일(성화)도 인위적인 권모술수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시다. 그러므로 아무 염려하지 말고 기독교만의 위대한 복음, 곧 회복(구속)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도록 통로를 열어줘야 한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창1-2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진수를 풍성하게 맛보는 일을 잠시 보류하고, 이번에는 창조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정리하는 일들을 하기로 한다. 창1:1절 하반절(1b/학문적인 용어, 원문을 중심으로 구분함)부터 시작되는 창조의 사실은 “(그) 하늘과 (그) 땅을.....!”이다. 필자가 “(그) 하늘과 (그) 땅을”이라고 한 것은 우리 말 성경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문에는 정관사인 “그”(· ה)가 “하늘”과 “땅”에 모두 붙어 있다(접두어). 여기에서 잠간 히브리어 원전(BHS)과 우리말 성경을 비롯한 많은 번역 성경들의 섬세한 차이점에 대해서 잠간 언급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제기하는 문제인, 우리말 성경이나 다른 번역 성경들이 히브리어 원전에 기록된 여러 가지의 요소들을 정확하게,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정관사, 접속사, 감탄사, 성(gender), 수(number), 관용어, 더 나아가서는 다양한 장르의 명확한 구분, 그리고 히브리어의 섬세함 등의 좀 더 세밀한 요소들이 생략되거나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성경(다른 복음적인 번역 성경들)이 잘못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정말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언급한 “부족함”이란, 보다 더 섬세하고, 풍요롭고, 깊은 의미들을 맛보는데 아쉬움을 피력한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창1:1절 하반절이 “천지를”(하늘과 땅)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대로 읽게 된다면 무언가 명쾌하게 정리가 되지 않으며, 혼동이 일어나게 된다. 즉 이 “하늘과 땅”(창1:1b)이 v.8의 “하늘”과 v.10의 “땅”과는 어떤 관계인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창조의 “서론”이라든지, 또는 “제2의 창조”라는 등의 무익하고 위험한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창1:1절에서부터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창조, 기독교의 위대한 유산을 하나님의 말씀, 처음부터, 첫 단어에서부터 그대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 원전에 “(그) 하늘과 (그) 땅”이라고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이 땅에 국한된 것만이 천상계와 지상계의 모든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위대한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물론 천상계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인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창1:2절에서 증거가 되겠지만, 천상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많이 알려주시지 않으셨으며, 더욱이 타락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제한적인 정보 외에는 허락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고후12장에서 “셋째 하늘”을 체험한 간증을 전하면서, “어떤 사람”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체험을 하였지만,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며,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받지 않았다”(TNIV/고후12:4) 라고 하면서 그 큰 체험을 마무리하면서 “오직 약한 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서 천상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되는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된 삶을 풍성히 누리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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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아 놀자!
    2022-04-26
  •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창세기 3장 이후부터 그 “여인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이 오기까지를 “옛 언약” 시대(구약시대)로 명명하여 임시적이고 제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셨다. 즉 모형(모델, 그림자,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안식)를 맛보게 하셨다. 그 첫 번째 모형이 짐승의 죽음을 통해 얻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이었으며(창3:21), 바로 이어서 아벨의 어린 양을 “주목”해 보셨다(창4:4/사역: 봐이솨/ looked), 아벨의 어린 양은 창3:15절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의 가장 선명한 이미지이다. 즉 여인의 후손은 어린 양과 같이 희생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셔서 하나님나라를 회복하실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3장 이후부터 여인의 후손의 실체가 오시기 전까지는 본래의 세계가 아닌,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모형의 세계라는 점을 확신하여 이 부분의 말씀을 이중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모형의 세계와 실체의 세계로 매끄럽게 연결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형의 세계를 실체로 해석하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매우 조심해야 한다. 드디어 “때가 차매”(갈4:4) “여인의 후손”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탄의 요구인 우리의 죄 값을 치러주시고 “자기 백성”인 우리를 영원한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나라(Already/Not Yet)에 살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곧 창조의 회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된 하나님나라는 죄악으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죄의 습성이 남아서 여전히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의 교회는 깨어 경성하여 이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싸움(영적전투)을 벌이면서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대망해야 한다. 이러한 전개가 바로, 개혁주의적,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며, 필자의 성경해석이다. 아무쪼록 간곡한 부탁을 드리고자 한다. 이제부터 “구약아 놀자!”라는 코너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놓고 읽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물론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전제, 또는 선입견이 있어서, 때로는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아주 좋지 못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으로 독자들의 선입견을 다 버리라는 말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우선은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경을 그대로 읽기를 바란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문자적 읽기”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성경을 많이 읽으면(무조건적 통독), 다 된다.”라는 식으로 오판을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히는 바는 성경, 아니 어떤 글이든지 간에 문자만 보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큰 문제를 낳게 된다. 학교에서 글 읽기를 다시 배워야 한다. 혹신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손을 뻗치느냐하면, 신학의 무용론을 주장하게 되거나, 자기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까지 하게 된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허하게 엎드릴 줄 아는 자세부터 견지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경을 많이 통독하고, 많은 참고서를 읽고(수없이 많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함), 많이 배우고, 묵상하고, 실행하기를 결단하기를 바란다. 특히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명을 맡은 우리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여, “이제 말씀으로는 안 된다.”가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해도 “언제나 말씀으로 된다.”라는 고집을 부리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를 감히 부탁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야말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하고, 위대하시고, 맛과 멋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사실을 마음껏 감상하기를 바란다. “별들을 불러내어 하늘에 걸어놓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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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아 놀자!
    2022-03-19
  • 창조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증거한다
    기독교에는 그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오묘하고 신비하고, 맛있고, 멋있는, “창조”(앞으로는 타락 전,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를 한마디로 ‘창조’라고 호칭한다)라는 “사실”이 있다는 것이 가장 위대하며, 독특하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교회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데 이 창조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기독교에 대해서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흔히 하나님의 교회는 이미 주일학교에서 문을 닫고 말았다. 즉 창조는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므로 마친 것이라고,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옛날 옛적의 이야기로 마감을 짓고 말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은 창조에 대해서, 무슨 할 말이 좀이라도 많은지요! 혹시, 창조를 주제로 해서 시나 수필이나 소설, 그것도 장편소설을 쓸 정도의 풍부한 창조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바로, 창조의 아름답고 맛과 멋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살맛나는 세상이며, 오늘 잠을 이루는 시간이 행복하며, 내일 눈을 뜨는 순간이 행복의 단풍으로 물들여지는 오색 찬연한 세상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구신약성경의 가장 처음에 선포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는 선포는 신비하고, 위대하며, 가장 맛있고, 멋있고, 행복으로 가득한 보물창고를 여는 감격적이고, 부요한 말씀이다. 필자가 굳이 창1:1절을 두 부분으로 나눈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이 말씀은 앞으로 전개될 모든 성경의 근거가 되며, 위대하신 십자가의 사연(story)을 풍성하게 감각하게 하며, 십자가의 복된 삶의 부요함을 안겨주며,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대망사상으로 완결되게 된다. 참 좋은 소식이기에 성급한 마음으로 좀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우리의 구원은 창조의 회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창조는 이 세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 완성된 영원한 하나님나라(예수님의 재림)의 모델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 회복된 복된 삶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여, 완성된 하나님나라에 두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교회는 창조의 부요함을 만끽하게 되는 특권을 부여받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필자는 앞으로 모든 사실들을 진술할 때, 거의 모두 이 창조의 부요함을 근거로 해서 진행할 것이다. 즉 창조의 완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타락의 암흑을 지나서, 새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한 구속(회복)의 세계를 강조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습성이 남아있는 죄와의 영적 전투를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달려 갈 것을 권고하며, 마침내 우리 주님,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은 필자의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틀(framework)이다. 이 틀을 근거로 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형성하며, 그로인해 구원의 부요함을 만끽하게 된다. 앞으로 전개될 글에서는 이 부분을 심도 있게 다룰 수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이 틀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틀을 구속사적으로 매끄럽게 연결시키는 데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다. 즉 창1-2장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5)”로 평가된 그 복된 “창조”로부터 구원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되어 삶의 맛과 멋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결국 이러한 부정적인 세계관은 구원의 부요함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으로 떨어지고 만다. 앞으로 계속해서 언급하겠지만 창조의 부요함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부터 창조에 감동을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적인 행복의 삶인, 창조는 사탄과 아담의 합작으로 인해 파괴되고 말았다. 즉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로 표현된 하나님과 신실한 교제, 즉 안식이 파괴된 놀라운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해서는 감히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다 말할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에 유한한 우리로서는 겸허한 자세로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놀라운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여 하나님과의 단절의 상태에 이른 비참한 인간에게 “여인의 후손”(창3“15)을 보내신다는 약속(언약)을 주셨다. 이 ”여인의 후손“은 장차 십자가를 통해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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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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