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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동성애 홍보에 초점 맞춘 언론들
    지난 16일 서울시청 광장에서는 동성애와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서울문화퀴어축제’(동성애 행사와 홍보)가 열렸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 서울시의회를 중심으로 ‘동성애퀴어축제반대국민대회’가 열렸다. 외견상으로 보기에도 반대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10배는 많아 보였다. 그만큼 국민들은 동성애와 이로 인한 소위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행사가 열리기 전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울시의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가 퀴어문화축제 서울광장 사용 허용에 대하여 63.4%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또 공공장소에서 과도한 노출,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것에 대하여 71.4%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런 행사에 자녀들과 함께 가족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는 참여할 수 없다라는 대답이 무려 78.9%를 차지하였다. 국민들이 정말 싫어하는 동성애 행사를 서울시가 허용한 셈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축제는 열렸고, 언론 보도에 의하면 1만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반면에 이를 반대하는 국민대회는 그 10배 가까이 참가했지만, 언론들은 엇비슷한 숫자라고 보도하거나 아예 숫자를 보도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동성애 반대 열기를 외면한 잘못된 처사이다. 우리나라 언론들이 언제부터 이처럼 한심한 편집증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정황들은 사진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언론들은 이미 동성애 축제에 초첨을 맞추고, 이에 반대하는 많은 국민들의 목소리는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는 편향된 보도를 통해서 여론을 왜곡하며 ‘국민의 알 권리’를 공공연히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 행사나 이를 반대하는 집회가 같은 날 같은 시각, 옆의 장소에서 벌어졌는데도, 한쪽은 과장하거나 한쪽은 축소시키고 아예 없었던 일처럼 대하고 있는 태도는 비난과 지탄을 받기에 합당하다. 공영방송이나 공중파 방송이나 중앙 언론이나 정말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고, 꼭 알아야 할 국민적 외침의 중요한 현장을 배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언론의 수용자이며 전파의 주인인 국민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국민적 목소리가 엄연히 있음에도 이를 차별하거나 일부러 보도를 회피하는 것은 한쪽 눈을 감은 것과 같다. 어찌 한쪽 눈만으로 세상의 넓은 풍경을 담아낼 수 있을까? 언론은 두 눈 크게 뜨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소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양심의 목소리와 인간의 참된 삶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종교의 절절한 외침을 간과(看過)하지 말라.
    • 오피니언
    • 논평
    2022-07-22
  • 논 평 / MB정부로 회귀한 윤석열정부의 부자·대기업 감세
    21일 2022년 세제개편안이 발표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부자/대기업에 파격적인 감세혜택을 주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는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와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불평등이 심화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재정여력 확보가 절실한 시점에서 거꾸로 대규모 감세를 추진한 것으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우선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인하하여, MB정부의 세율로 회귀하였다. 명목세율이 OECD 평균에 비해 높다는 것을 감세의 이유로 내세웠으나, 중요한 것은 명목세율이 아니라 각종 공제감면이 반영된 실효세율이다. 법인세 과세표준 5,000억원을 초과하는 기업의 실효세율이 그 아래 구간의 기업의 실효세율 보다 낮은 실효세율 역전현상은 2021년에도 지속되고 있다. 그나마 과세표준 3,000억원 구간의 최고세율을 인상했기 때문에 과거보다 실효세율 역전의 정도가 완화되었는데, 그 효과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과세표준 구간이 많은 것이 문제라면 22% 세율구간을 25%로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합부동산세에서도 대규모 감세방안이 발표되었다.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율을 폐지하여 최고세율을 6.0%에서 2.7%로 절반 이하로 대폭 인하하였다. 세부담 상한 축소, 주택에 대한 기본공제금액 상향, 1세대 1주택 특별공제 도입 등 고액 자산가의 세금을 깎아주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부동산 가격 하향 안정화를 위해서는 기왕에 강화해 둔 종합부동산세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부자 감세를 통해 부동산 가격 안정화의 가능성도 줄여버렸다. 금융투자소득 전면과세가 2년 유예된 것도 문제이다. 자산소득에 대한 적정한 과세는 공평과세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과도한 기본공제가 적용되긴 했으나, 주식양도차익을 포함하여 금융투자소득에 대해 전면과세를 하기로 한 것은 의미있는 변화였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금융투자소득 전면과세를 2년 유예했을 뿐만아니라 주식양도차익의 과세대상을 종목당 1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대폭 상향하여 고액 자산가의 세금을 크게 줄여주었다. 상속세와 증여세에도 감세가 추진되었다. 가업상속공제의 적용대상과 공제한도를 상향 조정하고, 사후관리 기간이 단축되었으며, 사후관리 요건도 완화되었다. 그밖에도 주택임대소득의 고가주택 기준이 상향조정되고 가상자산 과세가 2년 유예되는 등 자산소득에 대한 과세를 줄여줄 수 있는 온갖 방안이 동원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막대한 감세규모와 그 혜택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에 대해서 꼼수를 동원하여 그 실상이 잘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는 점이다. 누가봐도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금융투자소득세, 상속/증여세 등에서 상당한 감세를 추진했는데, 기획재정부는 5년간 감세규모가 13.1조원 수준이고, 그 중에서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귀속되는 감세액은 5.3조원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기획재정부의 5년간 감세규모는 전년대비 기준으로 계산되었다. 하지만, 과거에 큰 규모의 증세나 감세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전년대비로 계산한 순액법 뿐만아니라 기준년도와 비교한 누적법 수치를 같이 비교 표시하여 일반 국민들이 그 효과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예를 들어, 기준년도에 100조원의 세수가 있었는데 감세안을 통해 1년차에 95조원, 2년차부터 5년차까지 90조원의 세수가 예상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감세의 5년 효과를 10조원(1차년도 전년대비 5조원 감소, 2차년도에 1차년도 대비 5조원 감소, 3차년도 이후는 전년과 동일하므로 감소액 없음)으로 표시하는 것과 45조원(1차년도에 5조원 감소, 2차년도부터 4년간 10조원씩 40조원 감소)으로 표시하는 것 중에서 어느 방법이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 부합하는가? 당연히 기준년도와 비교하여 누적법으로 계산한 45조원이다. 누적법으로 계산하면 2022년 세제개편안을 감세효과는 60조원을 넘는다. 윤석열 정부가 취임하자마자 기획재정부가 찾아낸 초과세수 53조원을 넘어서는 금액이다. 감세규모를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제시하고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그 실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세부담 귀착효과도 과거와 다른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2021년 이전 세부담 귀착효과는 서민·중산층/고소득자, 중소기업/대기업으로 구분하여 분석되었다. 그리고 서민·중산층은 OECD 기준을 적용하여 중위소득 150% 이하로 계산되었다. 반면, 2022년 계산시에는 서민·중산층을 중위소득 200% 이하로 구분하여 과거보다 그 범위를 확대했다. 고소득자에 귀속되는 감세효과를 줄이기 위한 꼼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법인세에서도 중견기업을 따로 떼내어 중소기업에 포함시켰다. 과거의 분류대로 할 경우, 중소기업에 귀착되는 감세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분류를 변경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지금처럼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기에는 적극적인 재정의 역할이 요구된다. 적자를 보는 기업이나 가계는 법인세나 소득세를 아무리 깎아줘봐야 아무런 혜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업이나 가계가 이 위기를 버텨나갈 수 있도록 하려면 재정지출을 확대해야 한다. 더구나 이번 세제개편안은 변동 국면에서 각종 이득을 보고 세부담 여력이 있는 대기업, 고소득자, 고액자산가에 집중되었다. MB정부 때 작동하지 않았던 낙수효과만을 기대하는 비합리적인 정책이다. 윤석열 정부는 세부담 여력이 있는 계층에 대한 증세를 통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번 감세안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 하여야 한다. 2022년 7월 22일 내가만드는복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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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평
    2022-07-22
  • 〔특별기고〕 검수완박? 중단하라.
    민주당 정권과 대한민국 검찰의 대립이 ‘검수완박’의 4월 국회처리 시도로 그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검수완박’은 검찰이 가지고 있는 범죄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기소권만 남겨둔다는 것으로 겉으로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로서 검찰개혁을 완수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게 과연 집권당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추진하는 것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검찰의 비대한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검경수사권 조정이 이루어져 검찰은 6대 범죄 수사권만 가지고 있고 고위층의 비리를 담당하는 공수처도 만들어 졌다. 그런데 수사권을 넘겨받은 경찰의 무능력으로 고소고발사건의 처리가 엄청나게 지연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고 민주당이 외쳤던 검찰개혁의 상징인 공수처가 그야말로 공수처(空手處)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빈껍데기이다. 따라서 검찰개혁을 완수하려면 이미 이루어진 제도개혁에 따르는 문제점들의 보완이 먼저일 것이다. 검찰개혁 완수하려면 제도개혁 문제점들 보완이 먼저 그런데 집권세력들은 문대통령 임기를 불과 며칠 남겨두지 않는 이 시점에 다시 검수완박을 들고 나왔다. 검수완박은 1년여 전 추윤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내쫓기 위해 민주당이 급조해서 만든 법안이다. 당시 윤석렬 총장이 “검수완박은 부패완판”이라는 말을 남기고 총장직을 사임하자 이 법안은 잊혀졌다. 다시 말하면 검수완박은 법치주의 초석을 이루는 준사법기관인 검찰의 중립성 보장이라는 검찰개혁의 대의와는 거리가 먼 정치적인 포석에 불과하였다. 우리 헌법 제12조는 구속이나 압수수색은 검사의 청구에 의해 법원에 의해 발부한 영장에 의거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검사가 수사의 주체임을 명확히 규정한 것으로 검사에게서 수사권을 박탈하는 것은 명백한 헌법위반이 아닐 수 없다. 백보를 양보해서 굳이 수사와 기소를 분리해야 검착개혁이 완수된다면 수사와 기소권을 함께 가지고 있는 공수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나아가 일단 검찰로부터 6대 범죄 수사권을 뺏고 이를 어디에 부여할 것인지는 추후 보완입법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 다수당의 힘만 믿고 이렇게 국가 헌법질서, 법치주의를 가볍게 여기고 흔들어도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검수완박이라는게 검사 윤석렬에 정권을 빼앗긴데 대한 앙갚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일각에서 의심하듯이 퇴임후 문대통령이나 이재명 수사의 방탄용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도 상식과 법치주의를 믿는 의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진정 검찰의 독립성은 원한다면 차기 정부와 협력해서 대의를 모아 추진하는 것이 순리요 상식이다. 민주당과 집권세력은 국가의 헌법질서를 감정적 정파적 목적만으로 뿌리채 흔들려는 시도를 중각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 오피니언
    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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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동성애 홍보에 초점 맞춘 언론들
    지난 16일 서울시청 광장에서는 동성애와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서울문화퀴어축제’(동성애 행사와 홍보)가 열렸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 서울시의회를 중심으로 ‘동성애퀴어축제반대국민대회’가 열렸다. 외견상으로 보기에도 반대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10배는 많아 보였다. 그만큼 국민들은 동성애와 이로 인한 소위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행사가 열리기 전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울시의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가 퀴어문화축제 서울광장 사용 허용에 대하여 63.4%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또 공공장소에서 과도한 노출,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것에 대하여 71.4%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런 행사에 자녀들과 함께 가족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는 참여할 수 없다라는 대답이 무려 78.9%를 차지하였다. 국민들이 정말 싫어하는 동성애 행사를 서울시가 허용한 셈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축제는 열렸고, 언론 보도에 의하면 1만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반면에 이를 반대하는 국민대회는 그 10배 가까이 참가했지만, 언론들은 엇비슷한 숫자라고 보도하거나 아예 숫자를 보도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동성애 반대 열기를 외면한 잘못된 처사이다. 우리나라 언론들이 언제부터 이처럼 한심한 편집증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정황들은 사진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언론들은 이미 동성애 축제에 초첨을 맞추고, 이에 반대하는 많은 국민들의 목소리는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는 편향된 보도를 통해서 여론을 왜곡하며 ‘국민의 알 권리’를 공공연히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 행사나 이를 반대하는 집회가 같은 날 같은 시각, 옆의 장소에서 벌어졌는데도, 한쪽은 과장하거나 한쪽은 축소시키고 아예 없었던 일처럼 대하고 있는 태도는 비난과 지탄을 받기에 합당하다. 공영방송이나 공중파 방송이나 중앙 언론이나 정말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고, 꼭 알아야 할 국민적 외침의 중요한 현장을 배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언론의 수용자이며 전파의 주인인 국민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국민적 목소리가 엄연히 있음에도 이를 차별하거나 일부러 보도를 회피하는 것은 한쪽 눈을 감은 것과 같다. 어찌 한쪽 눈만으로 세상의 넓은 풍경을 담아낼 수 있을까? 언론은 두 눈 크게 뜨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소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양심의 목소리와 인간의 참된 삶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종교의 절절한 외침을 간과(看過)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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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2
  • 논 평 / MB정부로 회귀한 윤석열정부의 부자·대기업 감세
    21일 2022년 세제개편안이 발표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부자/대기업에 파격적인 감세혜택을 주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는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와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불평등이 심화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재정여력 확보가 절실한 시점에서 거꾸로 대규모 감세를 추진한 것으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우선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인하하여, MB정부의 세율로 회귀하였다. 명목세율이 OECD 평균에 비해 높다는 것을 감세의 이유로 내세웠으나, 중요한 것은 명목세율이 아니라 각종 공제감면이 반영된 실효세율이다. 법인세 과세표준 5,000억원을 초과하는 기업의 실효세율이 그 아래 구간의 기업의 실효세율 보다 낮은 실효세율 역전현상은 2021년에도 지속되고 있다. 그나마 과세표준 3,000억원 구간의 최고세율을 인상했기 때문에 과거보다 실효세율 역전의 정도가 완화되었는데, 그 효과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과세표준 구간이 많은 것이 문제라면 22% 세율구간을 25%로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합부동산세에서도 대규모 감세방안이 발표되었다.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율을 폐지하여 최고세율을 6.0%에서 2.7%로 절반 이하로 대폭 인하하였다. 세부담 상한 축소, 주택에 대한 기본공제금액 상향, 1세대 1주택 특별공제 도입 등 고액 자산가의 세금을 깎아주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부동산 가격 하향 안정화를 위해서는 기왕에 강화해 둔 종합부동산세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부자 감세를 통해 부동산 가격 안정화의 가능성도 줄여버렸다. 금융투자소득 전면과세가 2년 유예된 것도 문제이다. 자산소득에 대한 적정한 과세는 공평과세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과도한 기본공제가 적용되긴 했으나, 주식양도차익을 포함하여 금융투자소득에 대해 전면과세를 하기로 한 것은 의미있는 변화였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금융투자소득 전면과세를 2년 유예했을 뿐만아니라 주식양도차익의 과세대상을 종목당 1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대폭 상향하여 고액 자산가의 세금을 크게 줄여주었다. 상속세와 증여세에도 감세가 추진되었다. 가업상속공제의 적용대상과 공제한도를 상향 조정하고, 사후관리 기간이 단축되었으며, 사후관리 요건도 완화되었다. 그밖에도 주택임대소득의 고가주택 기준이 상향조정되고 가상자산 과세가 2년 유예되는 등 자산소득에 대한 과세를 줄여줄 수 있는 온갖 방안이 동원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막대한 감세규모와 그 혜택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에 대해서 꼼수를 동원하여 그 실상이 잘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는 점이다. 누가봐도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금융투자소득세, 상속/증여세 등에서 상당한 감세를 추진했는데, 기획재정부는 5년간 감세규모가 13.1조원 수준이고, 그 중에서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귀속되는 감세액은 5.3조원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기획재정부의 5년간 감세규모는 전년대비 기준으로 계산되었다. 하지만, 과거에 큰 규모의 증세나 감세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전년대비로 계산한 순액법 뿐만아니라 기준년도와 비교한 누적법 수치를 같이 비교 표시하여 일반 국민들이 그 효과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예를 들어, 기준년도에 100조원의 세수가 있었는데 감세안을 통해 1년차에 95조원, 2년차부터 5년차까지 90조원의 세수가 예상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감세의 5년 효과를 10조원(1차년도 전년대비 5조원 감소, 2차년도에 1차년도 대비 5조원 감소, 3차년도 이후는 전년과 동일하므로 감소액 없음)으로 표시하는 것과 45조원(1차년도에 5조원 감소, 2차년도부터 4년간 10조원씩 40조원 감소)으로 표시하는 것 중에서 어느 방법이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 부합하는가? 당연히 기준년도와 비교하여 누적법으로 계산한 45조원이다. 누적법으로 계산하면 2022년 세제개편안을 감세효과는 60조원을 넘는다. 윤석열 정부가 취임하자마자 기획재정부가 찾아낸 초과세수 53조원을 넘어서는 금액이다. 감세규모를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제시하고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그 실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세부담 귀착효과도 과거와 다른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2021년 이전 세부담 귀착효과는 서민·중산층/고소득자, 중소기업/대기업으로 구분하여 분석되었다. 그리고 서민·중산층은 OECD 기준을 적용하여 중위소득 150% 이하로 계산되었다. 반면, 2022년 계산시에는 서민·중산층을 중위소득 200% 이하로 구분하여 과거보다 그 범위를 확대했다. 고소득자에 귀속되는 감세효과를 줄이기 위한 꼼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법인세에서도 중견기업을 따로 떼내어 중소기업에 포함시켰다. 과거의 분류대로 할 경우, 중소기업에 귀착되는 감세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분류를 변경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지금처럼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기에는 적극적인 재정의 역할이 요구된다. 적자를 보는 기업이나 가계는 법인세나 소득세를 아무리 깎아줘봐야 아무런 혜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업이나 가계가 이 위기를 버텨나갈 수 있도록 하려면 재정지출을 확대해야 한다. 더구나 이번 세제개편안은 변동 국면에서 각종 이득을 보고 세부담 여력이 있는 대기업, 고소득자, 고액자산가에 집중되었다. MB정부 때 작동하지 않았던 낙수효과만을 기대하는 비합리적인 정책이다. 윤석열 정부는 세부담 여력이 있는 계층에 대한 증세를 통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번 감세안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 하여야 한다. 2022년 7월 22일 내가만드는복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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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평
    2022-07-22
  • 절박한 믿음만 있다면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루카 5,17-26)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는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나 뜻도 '이것 아니면 저것'의 논리로 판단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도 주님의 뜻이고, 저렇게 하는 것도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워하고 갈등하면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이것도 주님의 뜻이요, 저 것도 주님의 마음임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훨씬 마음 편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다르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것을 받아 드리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인처럼 이런저런 판단만 하지 않는다면 주님 말씀 따라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박하게 믿느냐?' 주님의 물음입니다.
    • 오피니언
    • 새누리묵상
    2022-04-26
  • “(그) 하늘과 (그) 땅을.....!” (창1:1b)
    성경은 무엇보다도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과 신비함과 오묘함을 장엄하게 울리고 있다. 이 창조야말로 기독교만의 위대한 선물이요, 재산이요, 능력이요, 소망이다. 이 말은 기독교의 모든 것은 창조로부터 시작을 해서, 창조의 본래의 맛과 멋을 드러내며, 결국은 이 창조의 완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완성된 하나님 나라(“Not yet”)로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계속해서 강조해 왔지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 곧 기독교의 유일한 창조의 사실을 그대로 통째로 이해하고 수용하여 모든 것의 출발점을 “신비, 위대함, 능력, 소망, 좋음” 등에 두고, 부요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위대함’을 비롯한 ‘좋음, 긍정’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고, 온갖 ‘좋지 않음과 부정’의 잔재들만을 풍성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를 펼치든지 간에 ‘좋음과 긍정’의 말을 하기보다는 ‘징벌, 파괴, 고통’ 등의 채찍을 들고서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선포할 때에는 그 좋은 말들(“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복 받습니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으면서도, 어렵게, 정말 어렵게 들어온 “천하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서 마구, 마구 징벌의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왔으니 정말 잘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칭찬만 해줘도 부족할 텐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혹자들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어렵게 들어온 사람들일지라도, 이제 기독교의 그 혹독한 채찍(율법준수)을 내려쳐야만 제대로 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대로 날라 가버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본인들도 다하지 못하는 무거운 이상한 십자가(율법의 저주)를 지우고 있다. 물론 필자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무시하거나, 폐기시키거나, 등한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복음의 은혜로 충만한 하나님나라의 부요함을 맛보게 하면, 성령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더욱 성숙되게 하시고, 더욱 새롭게 하시고, 완성된 하나님나라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달려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거룩한 일(성화)도 인위적인 권모술수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시다. 그러므로 아무 염려하지 말고 기독교만의 위대한 복음, 곧 회복(구속)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도록 통로를 열어줘야 한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창1-2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진수를 풍성하게 맛보는 일을 잠시 보류하고, 이번에는 창조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정리하는 일들을 하기로 한다. 창1:1절 하반절(1b/학문적인 용어, 원문을 중심으로 구분함)부터 시작되는 창조의 사실은 “(그) 하늘과 (그) 땅을.....!”이다. 필자가 “(그) 하늘과 (그) 땅을”이라고 한 것은 우리 말 성경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문에는 정관사인 “그”(· ה)가 “하늘”과 “땅”에 모두 붙어 있다(접두어). 여기에서 잠간 히브리어 원전(BHS)과 우리말 성경을 비롯한 많은 번역 성경들의 섬세한 차이점에 대해서 잠간 언급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제기하는 문제인, 우리말 성경이나 다른 번역 성경들이 히브리어 원전에 기록된 여러 가지의 요소들을 정확하게,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정관사, 접속사, 감탄사, 성(gender), 수(number), 관용어, 더 나아가서는 다양한 장르의 명확한 구분, 그리고 히브리어의 섬세함 등의 좀 더 세밀한 요소들이 생략되거나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성경(다른 복음적인 번역 성경들)이 잘못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정말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언급한 “부족함”이란, 보다 더 섬세하고, 풍요롭고, 깊은 의미들을 맛보는데 아쉬움을 피력한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창1:1절 하반절이 “천지를”(하늘과 땅)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대로 읽게 된다면 무언가 명쾌하게 정리가 되지 않으며, 혼동이 일어나게 된다. 즉 이 “하늘과 땅”(창1:1b)이 v.8의 “하늘”과 v.10의 “땅”과는 어떤 관계인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창조의 “서론”이라든지, 또는 “제2의 창조”라는 등의 무익하고 위험한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창1:1절에서부터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창조, 기독교의 위대한 유산을 하나님의 말씀, 처음부터, 첫 단어에서부터 그대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 원전에 “(그) 하늘과 (그) 땅”이라고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이 땅에 국한된 것만이 천상계와 지상계의 모든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위대한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물론 천상계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인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창1:2절에서 증거가 되겠지만, 천상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많이 알려주시지 않으셨으며, 더욱이 타락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제한적인 정보 외에는 허락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고후12장에서 “셋째 하늘”을 체험한 간증을 전하면서, “어떤 사람”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체험을 하였지만,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며,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받지 않았다”(TNIV/고후12:4) 라고 하면서 그 큰 체험을 마무리하면서 “오직 약한 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서 천상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되는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된 삶을 풍성히 누리도록 해야 한다.
    • 오피니언
    • 구약아 놀자!
    2022-04-26
  • 꿀벌이 사라졌다
    올 봄 들어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양봉협회에 따르면 3월 전국 양봉협회 소속 농가를 대상으로 꿀벌 실종 피해조사 결과 4,159 농가의 38만 9,045개 벌통에서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 약 70억 마리 이상의 꿀벌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도대체 꿀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늘 우리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꿀벌이 왜 사라진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나오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기후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꿀벌 집단 폐사 원인은 지난 겨울에 기상 환경이 상당히 불규칙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예년에 비해서 지나치게 추웠다는 것이 큰 요인이다. 특히 2021년 겨울 같은 경우는 소위 '몹시 추운 겨울'이었고 그 겨울이 오기 전에 11월과 12월은 상대적으로 너무 따뜻했다. ‘이상기후’다. 겨울에 뜬금없이 기온이 올라가자 착각한 벌들이 밖으로 나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것이다. 꿀벌들도 겨울 준비를 하고, 양봉 농가들도 겨울 준비를 하는 타이밍도 놓쳤다. 꿀벌들이 겨울 준비하는 생리적인 리듬이 깨진 것이다. 일련의 과정에 환경이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이 생태계의 생존기반을 무너지게 하였다. 그러다보니 꿀벌들이 자연의 복합적인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 실제로 벌꿀의 대부분은 포도당과 과당, 당분이고 에너지원이 되고, 각종 미네랄과 항생 물질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이 꽃가루와 벌꿀이 충분히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으면 질병면역성과 저항성이 약해져 질병에 대한 감수성은 높아지고 전반적인 건강성은 낮아지는 현상이 생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충분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건강한 삶을 살고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꿀벌이 사라지므로 직접적으로는 우리 양봉 농가들의 생산이나 양봉 농가의 소득에 직접 피해가 생긴다. 생계에 큰 피해가 가고, 식물의 번식을 도와주는 생태계의 붕괴로 나타난다. 이런 생태계 서비스가 정상 작동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농산물의 생산량의 저하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농작물 생산이 매해 약 24조원에서 28조원 정도가 되는데 그중 6조원 이상이 꿀벌 등이 화분매개에 의한 생산이다. 꿀벌이 사라지므로 이러한 사과, 배, 딸기, 복숭아 등을 포함한 이런 과실, 과채류, 과수의 생산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이것이 물가인 상으로 결국은 개인의 영양 관리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꿀벌이 사라지는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위기가 처음으로 좀 이슈화된 미국에서 CCD(군집 붕괴 장애Colony Collapse Disorder: CCD)라는 이름으로 꿀벌 봉군이 붕괴된 2006년부터다. ‘벌들이 집을 나가서 사라진다’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꿀벌의 실종이 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이러한 현상들과 이러한 보고들은 미국에서부터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초기 아시아권에서는 이러한 위기 문제가 깊게 관심을 가지거나 논의되지 않았다. 최근에 기상이변과 기후변화를 맞으면서 영향의 크기가 커졌다, 그렇게 꿀벌의 사라짐이 본격적으로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러면 꿀벌의 위기 대책은 있는가. 먼저 꿀벌의 건강성을 증진시켜줄 수 있는 어떤 관리의 문제. 이것은 대부분 양봉 농가들이 꿀벌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꿀벌이 사라진 표면적인 원인은 병충해다. 꿀벌의 관리에서 꿀벌 해충 대한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이런 기생성인 해충들의 문제는 단순히 꿀벌을 괴롭히는 것뿐만 아니고 이 기생성인 해충들이 꿀벌의 다른 질병들, 바이러스병이나 세균병들을 매개로 한다. 다른 질병을 또 가져다준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전문가들은 꿀벌의 갑작스러운 대량 죽음이 종종 자연 파괴와 만연한 살충제 사용이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는 1천500여 재배 작물의 30%와 전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세계 100대 작물 중 71%가 꿀벌을 통해 수분을 공급한다고 한다. 만약 이렇게 계속 꿀벌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벌들의 수분을 통해 생장하는 식물들은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돼 멸종할 수도 있다. 인류에게는 대재앙이 될 수 있음도 불 보듯 뻔하다. 꿀벌이 사라진다면 100대 농산물 생산량이 현재의 29% 수준으로 줄어들어 지구상에 많은 사람의 삶의 질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각급 초등학교 학습,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교육 이런 수준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자연을 보호할 수 있는지, 꿀벌을 보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실제로 실천적인 과제들을 만들어내고 이걸 수행케 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꿀벌을 보호하는 대국민운동 차원에서 벌과 나비들을 관찰을 하게 하면서 이런 화분매개의 중요성, 벌의 중요성, 그 다음에 이것이 만들어내는 이 자연계, 생태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런 교육이 필요하다. 다른 측면에서는 이 화분매개 곤충, 꿀벌 모니터링 시스템을 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면 어떨까 싶다. 그렇게 국가 차원에서 자료들을 모으고, 물론 시민과 학자들과 과학자들이 함께 참여해서 조사해 온 결과들을 바탕으로 우리 지역에는 이런 곤충이, 꿀벌이 사라지고 또 어떤 새로운 곤충이 출현 하는가 이런 자료 구축을 통해 생태계 복원작업들이 이뤄낼 수 있다. 기후 변화와 기상 환경 변화로도 연결시켜 보호대책을 마련하는 작업도 병행 할 수 있다. 꿀벌은 협동과 근면, 생명력의 상징이었고, 인간에게 원기를 북돋아 줬다. 인류의 함께 한 작은 거인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꿀벌이 사라진 지구는 상상하기 어렵다. 꿀벌이 지탱해주던 생태계의 고리 하나가 붕괴되면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꿀벌의 처지는 2035년쯤이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올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UN은 2017년부터 꿀벌 보호를 위해 매년 5월20일을 ‘세계 벌의 날’로 지정해 벌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전국적으로 올 1~2월에 꿀벌 70억 마리 이상이 사라졌다는데 아주 작은 곤충이지만, 우리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될 위대하고 소중한 자산이다. 어떻게 꿀벌을 보호할 수 있을까. 양봉농가들이 앞장서 꿀벌들에게 적절한 영양을 제공해 주는 것. 이것이 중요한 이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꿀벌들이 밖에 나가서 먹이 활동을 할 수 있는 배경을 잘 만들어 주는 것이다. 꿀벌이 복합 영양분인 벌꿀을 제대로 먹지 못해 쇠약해진 상태에서 병해충과 싸워야 한다. 즉 야생의 많은 종류의 꽃과 꽃 피는 식물들에서 꿀과 꽃가루가 제공이 된다면 꿀벌은 조금 더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이 꽃 피는 식물들을 많이 심어주고 관리해 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 꿀벌을 살리는 지름길이다. 사실 집집마다 작은 꽃들을 키우는 것이 실은 어떻게 보면 어떤 아주 작은 노력이 될 수 있지만 이것들이 모이게 되면 생태계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아주 자그마한 자투리땅에 꽃을 심는데, 이 꽃들이 결국은 화분 매개자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공간을 제공하고 휴식처를 제공해 줌으로써 더 큰 생태계에서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자연계에서, 산에도 들에도 많은 꽃 피는 식물들의 경우, 화분매개를 통해서 종자들을 만들어내고 과실을 만들어냈을 때 이것이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는, 이런 먹이사슬 차원에서 생태계 순환이 매우 중요하다. 국제환경보호단체인 그린피스(Greenpeace)에 의하면 식량 재배에서 꿀벌의 기여 가치는 세계적으로 373조원이나 된다고 주장하고, 우리나라도 꿀벌의 경제적 가치가 6조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닌 꿀벌이 사라져가지만 평상시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 우리 인간의 단편적 어리석음은 주변의 소중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야 할 꿀벌같은 이웃이나 청년들이 고독사로 사라지고 있다. 전문가들의 말은 함께 살아야 할 꿀벌이 사라지는 환경을 계속 방치한다면 농업의 위기, 미래 생태계의 위기 더 나아가 인류 자신에게도 큰 위기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수필가, 다산문화예술진흥원)
    • 오피니언
    2022-04-20
  • 〔특별기고〕 검수완박? 중단하라.
    민주당 정권과 대한민국 검찰의 대립이 ‘검수완박’의 4월 국회처리 시도로 그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검수완박’은 검찰이 가지고 있는 범죄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기소권만 남겨둔다는 것으로 겉으로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로서 검찰개혁을 완수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게 과연 집권당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추진하는 것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검찰의 비대한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검경수사권 조정이 이루어져 검찰은 6대 범죄 수사권만 가지고 있고 고위층의 비리를 담당하는 공수처도 만들어 졌다. 그런데 수사권을 넘겨받은 경찰의 무능력으로 고소고발사건의 처리가 엄청나게 지연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고 민주당이 외쳤던 검찰개혁의 상징인 공수처가 그야말로 공수처(空手處)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빈껍데기이다. 따라서 검찰개혁을 완수하려면 이미 이루어진 제도개혁에 따르는 문제점들의 보완이 먼저일 것이다. 검찰개혁 완수하려면 제도개혁 문제점들 보완이 먼저 그런데 집권세력들은 문대통령 임기를 불과 며칠 남겨두지 않는 이 시점에 다시 검수완박을 들고 나왔다. 검수완박은 1년여 전 추윤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내쫓기 위해 민주당이 급조해서 만든 법안이다. 당시 윤석렬 총장이 “검수완박은 부패완판”이라는 말을 남기고 총장직을 사임하자 이 법안은 잊혀졌다. 다시 말하면 검수완박은 법치주의 초석을 이루는 준사법기관인 검찰의 중립성 보장이라는 검찰개혁의 대의와는 거리가 먼 정치적인 포석에 불과하였다. 우리 헌법 제12조는 구속이나 압수수색은 검사의 청구에 의해 법원에 의해 발부한 영장에 의거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검사가 수사의 주체임을 명확히 규정한 것으로 검사에게서 수사권을 박탈하는 것은 명백한 헌법위반이 아닐 수 없다. 백보를 양보해서 굳이 수사와 기소를 분리해야 검착개혁이 완수된다면 수사와 기소권을 함께 가지고 있는 공수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나아가 일단 검찰로부터 6대 범죄 수사권을 뺏고 이를 어디에 부여할 것인지는 추후 보완입법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 다수당의 힘만 믿고 이렇게 국가 헌법질서, 법치주의를 가볍게 여기고 흔들어도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검수완박이라는게 검사 윤석렬에 정권을 빼앗긴데 대한 앙갚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일각에서 의심하듯이 퇴임후 문대통령이나 이재명 수사의 방탄용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도 상식과 법치주의를 믿는 의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진정 검찰의 독립성은 원한다면 차기 정부와 협력해서 대의를 모아 추진하는 것이 순리요 상식이다. 민주당과 집권세력은 국가의 헌법질서를 감정적 정파적 목적만으로 뿌리채 흔들려는 시도를 중각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 오피니언
    2022-04-13
  • 지혜와 순수, 예수혁명가의 덕목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마태10,16-23) 오늘 새벽 FTA 관련 토론회를 시청하느라 잠을 설쳤습니다. 토론회가 끝나고도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토론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의도하지 않게 떠오르던 생각은 ‘예수의 정치성’ 문제였습니다. ‘당시 로마 식민지 아래에서 수많은 강압정치와 그에 준한 제도들을 예수는 어떻게 파악하고 저항했을까? 성서를 액면 그대로만 보면 예수는 그런 이슈에 직접대응하거나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했는가? 피해갔는가? 그저 추상적인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대해 말씀하고 가르쳤는가? 아니면 실제 예수 모습과는 다르게 '막달라 마리아와 러브스토리'마냥 경전성립과정에서 제외된 또 다른 예수의 흔적으로 상상해야 하는가?’ 저의 신학과 신앙의 판단으로는 예수가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폭력적 방법이나 비판으로 직접 저항하지 않았지만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로마의 비인간화, 반 평화에 용감하게 반대했다고 믿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 대비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평화’가 아닌 ‘나의 평화’를 준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세상의 평화의 거부는 바로 로마의 평화, 즉 ‘팍스 로마나’의 거부이고, 그것은 당시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인 것입니다. 물론 그 저항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저항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보나 보수라는 오늘의 정치적 성향 잣대로 예수혁명의 길을 가름하는 잘못된 평가입니다. 예수는 그런 기준보다 더 본원적인 차원에서 평화를 말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혁명은 모두 이런 방식이었습니다. 근원적인 문제를 보고 그것의 변화를 위해 말하고 실천하심이 동시에 당시에 사회 정치 종교의 문제까지도 동시에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지평까지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교적인 죄명을 뒤 짚어 쓰고 ‘정치적인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은 이런 예수혁명의 일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혁명을 꿈꾸는 예수혁명가들은 바로 이 혁명의 길을 따릅니다. 예수혁명가는 정치적 색깔이나 이데올로기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정치적 보수냐 혹은 진보라는 틀에 자유롭고 용감하게 근원혁명을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기대어 표현하자면 예수혁명가들은 흔들림 없이 지혜로우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 순박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현재 기독교 사회운동이 답보상태에 있는 이유도, 예수혁명은 뒷전에 있고 기꺼해야 사회개혁가들의 정치적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표현대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반(反)평화의 영과 폭력적 문화를 양산하는 기운, 그리고 이것을 위해 우리의 영을 침탈하는 악한 정서와 이데올로기, 즉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예수혁명이 맞닿는 운동의 지평이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처럼 정치적 선택과 결단을 수반할 수 없을지언정 그것에 매몰되지 않는 나, 우리, 이 세계의 참 혁명의 길입니다. 아직도 운동하는 이들의 수나 대모꾼들의 수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운동가들이 있습니다. 진보진양 조차 만약 ‘쪽수’나 데모규모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무의식 적으로도 착각한다면 엊그제 FTA 찬성론들이 돈으로 사람들을 동원한 FTA 찬성자들의 황당한 작태나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주의들조차 ‘지혜’와 ‘순수’를 회복해야할 때입니다. 순수가 우선입니다. 사회운동에서 운동이기주의 빠져 순수하지 못하면 이 세계를 보는 눈이 닫히게 될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하는 것이지요. 순수하지 못하면 하느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뜻을 알 수 없고 그러면 혁명을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순하면 지혜는 저절로 솟아 날 것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또 다른 지혜이지요. 말이 길었습니다. 오늘,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존재가 되라는 말씀을 더 절절하게 묵상하기 위해 어제 FTA 토론회 내내 답답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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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누리묵상
    2022-03-19
  •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창세기 3장 이후부터 그 “여인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이 오기까지를 “옛 언약” 시대(구약시대)로 명명하여 임시적이고 제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셨다. 즉 모형(모델, 그림자,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안식)를 맛보게 하셨다. 그 첫 번째 모형이 짐승의 죽음을 통해 얻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이었으며(창3:21), 바로 이어서 아벨의 어린 양을 “주목”해 보셨다(창4:4/사역: 봐이솨/ looked), 아벨의 어린 양은 창3:15절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의 가장 선명한 이미지이다. 즉 여인의 후손은 어린 양과 같이 희생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셔서 하나님나라를 회복하실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3장 이후부터 여인의 후손의 실체가 오시기 전까지는 본래의 세계가 아닌,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모형의 세계라는 점을 확신하여 이 부분의 말씀을 이중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모형의 세계와 실체의 세계로 매끄럽게 연결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형의 세계를 실체로 해석하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매우 조심해야 한다. 드디어 “때가 차매”(갈4:4) “여인의 후손”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탄의 요구인 우리의 죄 값을 치러주시고 “자기 백성”인 우리를 영원한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나라(Already/Not Yet)에 살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곧 창조의 회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된 하나님나라는 죄악으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죄의 습성이 남아서 여전히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의 교회는 깨어 경성하여 이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싸움(영적전투)을 벌이면서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대망해야 한다. 이러한 전개가 바로, 개혁주의적,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며, 필자의 성경해석이다. 아무쪼록 간곡한 부탁을 드리고자 한다. 이제부터 “구약아 놀자!”라는 코너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놓고 읽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물론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전제, 또는 선입견이 있어서, 때로는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아주 좋지 못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으로 독자들의 선입견을 다 버리라는 말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우선은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경을 그대로 읽기를 바란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문자적 읽기”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성경을 많이 읽으면(무조건적 통독), 다 된다.”라는 식으로 오판을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히는 바는 성경, 아니 어떤 글이든지 간에 문자만 보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큰 문제를 낳게 된다. 학교에서 글 읽기를 다시 배워야 한다. 혹신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손을 뻗치느냐하면, 신학의 무용론을 주장하게 되거나, 자기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까지 하게 된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허하게 엎드릴 줄 아는 자세부터 견지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경을 많이 통독하고, 많은 참고서를 읽고(수없이 많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함), 많이 배우고, 묵상하고, 실행하기를 결단하기를 바란다. 특히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명을 맡은 우리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여, “이제 말씀으로는 안 된다.”가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해도 “언제나 말씀으로 된다.”라는 고집을 부리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를 감히 부탁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야말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하고, 위대하시고, 맛과 멋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사실을 마음껏 감상하기를 바란다. “별들을 불러내어 하늘에 걸어놓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자!”
    • 오피니언
    • 구약아 놀자!
    2022-03-19
  • 창조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증거한다
    기독교에는 그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오묘하고 신비하고, 맛있고, 멋있는, “창조”(앞으로는 타락 전,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를 한마디로 ‘창조’라고 호칭한다)라는 “사실”이 있다는 것이 가장 위대하며, 독특하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교회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데 이 창조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기독교에 대해서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흔히 하나님의 교회는 이미 주일학교에서 문을 닫고 말았다. 즉 창조는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므로 마친 것이라고,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옛날 옛적의 이야기로 마감을 짓고 말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은 창조에 대해서, 무슨 할 말이 좀이라도 많은지요! 혹시, 창조를 주제로 해서 시나 수필이나 소설, 그것도 장편소설을 쓸 정도의 풍부한 창조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바로, 창조의 아름답고 맛과 멋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살맛나는 세상이며, 오늘 잠을 이루는 시간이 행복하며, 내일 눈을 뜨는 순간이 행복의 단풍으로 물들여지는 오색 찬연한 세상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구신약성경의 가장 처음에 선포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는 선포는 신비하고, 위대하며, 가장 맛있고, 멋있고, 행복으로 가득한 보물창고를 여는 감격적이고, 부요한 말씀이다. 필자가 굳이 창1:1절을 두 부분으로 나눈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이 말씀은 앞으로 전개될 모든 성경의 근거가 되며, 위대하신 십자가의 사연(story)을 풍성하게 감각하게 하며, 십자가의 복된 삶의 부요함을 안겨주며,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대망사상으로 완결되게 된다. 참 좋은 소식이기에 성급한 마음으로 좀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우리의 구원은 창조의 회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창조는 이 세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 완성된 영원한 하나님나라(예수님의 재림)의 모델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 회복된 복된 삶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여, 완성된 하나님나라에 두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교회는 창조의 부요함을 만끽하게 되는 특권을 부여받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필자는 앞으로 모든 사실들을 진술할 때, 거의 모두 이 창조의 부요함을 근거로 해서 진행할 것이다. 즉 창조의 완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타락의 암흑을 지나서, 새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한 구속(회복)의 세계를 강조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습성이 남아있는 죄와의 영적 전투를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달려 갈 것을 권고하며, 마침내 우리 주님,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은 필자의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틀(framework)이다. 이 틀을 근거로 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형성하며, 그로인해 구원의 부요함을 만끽하게 된다. 앞으로 전개될 글에서는 이 부분을 심도 있게 다룰 수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이 틀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틀을 구속사적으로 매끄럽게 연결시키는 데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다. 즉 창1-2장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5)”로 평가된 그 복된 “창조”로부터 구원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되어 삶의 맛과 멋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결국 이러한 부정적인 세계관은 구원의 부요함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으로 떨어지고 만다. 앞으로 계속해서 언급하겠지만 창조의 부요함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부터 창조에 감동을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적인 행복의 삶인, 창조는 사탄과 아담의 합작으로 인해 파괴되고 말았다. 즉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로 표현된 하나님과 신실한 교제, 즉 안식이 파괴된 놀라운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해서는 감히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다 말할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에 유한한 우리로서는 겸허한 자세로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놀라운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여 하나님과의 단절의 상태에 이른 비참한 인간에게 “여인의 후손”(창3“15)을 보내신다는 약속(언약)을 주셨다. 이 ”여인의 후손“은 장차 십자가를 통해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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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아 놀자!
    2022-02-26
  • [논평] 온라인 혐오 범죄로 인한 사망소식을 멈추기 위해 혐오 콘텐츠 생산하는 유튜버는 엄벌하고, 플랫폼 사업자의 책무는 강화하라
    배구선수 김인혁 씨와 BJ 잼미의 비보가 지난 주말, 연이틀 들려왔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소통을 위한 SNS 채널이 약자에 대한 혐오 정서의 배출구이자 비수의 창이 되어 세상을 향해 자신의 빛을 발하던 이들을 수년 간 멍들게 했다. 타인의 고통을 유희로 삼던 이들은 자신들이 내몬 죽음 앞에 발뺌하기 바쁘다. 이 죽음의 범인은 누구인가. 이 죽음의 공범은 누구인가. 김인혁 선수의 뒤를 이어 BJ 잼미의 소식이 들리자 유튜버 뻑가에게 시선이 쏠렸다. 뻑가는 121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로 BJ 잼미가 사용한 언어, 제스처, 옷 등을 근거로 페미니스트로 낙인찍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페미니즘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혐오세력을 대상으로 방송하며 구독자 수를 늘렸다. BJ 잼미의 사망 소식 이후 뻑가는 사과와 해명 영상을 올렸지만 이미 벌어진 죽음 뒤 자신의 책임을 발뺌하기 위한 너무나 늦은 사과였다. 김인혁 선수에게 인스타 DM, 기사 악플 등으로 고통을 안긴 SNS 이용자의 책임도 온 데 간 데 없다. 독일 연방의회는 2017년 10월, 페이스북, 유튜브 등 SNS 사업자가 플랫폼에 올라온 위법 게시물에 대한 신고를 받고, 위법 여부가 확실한 경우 24시간 내에 게시물을 삭제해야 한다는 내용을 그 골자로 하는 ‘소셜네트워크에서의 법집행 개선을 위한 법률(네트워크 법집행법)’을 시행했다. 그리고 2020년 6월, 이용자들이 신고를 간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과 SNS 사업자의 의무를 강화하는 등의 개정안을 의결했다. 2019년 독일 법무부가 페이스북이 이용자의 신고 편의성을 고려하지 않으며 네트워크 법집행법을 태만히 여긴데 약 200만 유로(약 2천 7백억 원)의 벌금을 물린 뒤에 이은 법 개정이었다. 혐오, 차별, 성착취가 난무하는 플랫폼 이용 환경 속에 사회적 약자라 불리는 이용자는 온라인에서도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어 폭력에 노출되고 목숨을 잃는다. 가해자의 무한한 폭력의 자유가 인정되는 온라인 환경이 아닌 모든 이용자에게 안전한 온라인 환경을 만들기 위한 규제가 필요하다. 먼저 혐오 콘텐츠 제작자의 사이버폭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혐오 상품을 통해 얻는 수익은 일반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인데 벌금은 수백 만 원 수준으로 제재의 효과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사법적으로 타인의 인생을 망치는 혐오범죄에 대해 중대한 처벌이 이뤄져야 하며, 인격살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강화되어야 한다. 더불어 혐오 콘텐츠와 폭력을 방치하는 SNS 사업자에 대한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 혐오 상품의 생산자들은 혐오와 성착취가 이윤을 창출하는 산업이 된 구조의 산물이다. 디지털 혐오와 성착취가 돈을 벌 수 있도록 하는 기반에 SNS 플랫폼이 있다. 한 사람의 내면을 철저히 해체하고 그 위에서 전리품을 나누며 조롱하는 잔인한 폭력이 문화가 되는 사회가 문명사회인가. 비인간적인 혐오를 온라인 문화로 둔갑 시키는 개인들과, 이를 유포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플랫폼을 국가가 재제하지 않는 한, 국가도 이 죽음의 공범이다. 2022.02.08.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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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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